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2002-08-19 오후 9:40
주:(이제부터 성경에 기록 된 말씀을 인용 할 때는 누구의 글, 또는 장절에 매이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냥 성경에 기록 된 말씀은 묶음표로만 구분 하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 중에서, 위에서 나신 그리스도와 아래서 난 제자들의 생각이 다른 데서 온 큰 오해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곧『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증거 된 대로, 하나님께로 난 자의 생각과 사람으로 난 자의 생각은 근본으로 다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자기 혈육을 죽이려 하지만 사람으로 난 자는 자기 혈육을 살리려고 합니다. 이는『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본 질이 다르기에 같을 수 가 없습니다.
또 기록되기를『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아래서 난 사람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성령께서 누구를 통해 성경에 기록 하시기를『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함과 같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지금 낱낱이 살피려면 제게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러면 오늘은 크게 오해된 부분 중에 한곳만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세상에 계실 때에『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하셨던 기록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아들 시몬, 곧 안드레의 형제 시몬에 대하여 가름이 없이 베드로로만 생각하여 혼돈을 가져옵니다. 분명 베드로란 이름은 시몬이 장차 돌이킨 후의 이름을 주님께서 미리 지어 주셨던 것입니다. 기록되기를『....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하심 같이 “지금”의 이름이 아니고 “장차”의 이름 입니다. 사람은 지금과 장차를 혼돈합니다. 그러므로『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해결되는 길은 기록 된 말씀대로『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하심이 이루어 질 때만 빛과 어두움이 나뉘어 지고 “지금”과 “장차”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란 증거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도 지금이 아니고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믿는 자에게는 바라는 구원이 지금 실상의 구원으로 여기게 되는 것뿐입니다. 증거 되기를『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하셨고 또『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 곧 구원의 실상이 있는 자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들의 대화에서 얼마나 생각이 다른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래서 난 나사렛 예수의 제자들은 위에서 나신 생명의 주를 따르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과 하나가 아니기에 자기들의 생명과 나사렛 예수의 목숨을 함께 지키려고 검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를 영의 사람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불법 자”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래전이 예언 되기를『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미리 증거 되었고 이를 생명의 주님께서는 “범죄자 중 하나로”를 “불법자의 동류”로 바꾸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생명의 주께서 왜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라고 그렇게도 검에 대하여 강조 하셨을까요? 여기에서부터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영의 생각은『....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이었으나 육의 생각은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다른 목숨을 죽이는 검(칼)로 생각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라는 증거의 말씀대로 나타나지는 가름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그들에게 미리 “검을 가지지 말라” 하지 않으셨을까요? 진리는 어느 사실에 접 할 때에만 그 효력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또한『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오신 참 빛이셨기에 미리 “검을 가지지 말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그 법과는 상관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 곧 “하지 말라”는 법은 곧 종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법은『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입니다. 이는 예언 된 대로『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함과 같은 것입니다.
종의 법은 죽이는 법이지만 아들의 법은 살리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육신에서의 고백은『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사실이 반드시 필요 했으나 이제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음으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하는 그리스도의 가벼운 멍에를 메고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있었던 제자들은 주님께서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하시니 사람의 생각대로 이제야 자기들이 가지고 다니던 검(칼)을 쓸 때가 된 줄로 알았고 또 이미 두 사람은 벌서부터 검을 가지고 다녔기에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라고 신이 나게 대답하였든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그들이 얼마나 “불법 자”들임을 다시 확인 하시고 “족하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육신에 있었던 제자들은 그 “족하다” 하신 말씀이 검 둘만 있어도 육신의 목숨을 지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많이 흥분 되었을 것이고 또한 앞으로 있어질 일도 상상했었을 것입니다. 풍랑도 잔잔케 하신 예수, 잎이 무성하던 무화과나무도 뿌리까지 마르게 하신 예수, 죽은 자도 살리신 예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인 만은 무리들을 먹이시고도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나 차게 하셨던 예수, 앉은뱅이도 일으키시고 소경도 보게 하시며 문둥이도 깨끗하게 하시고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 까지 만나신 예수, 이제 그가 검 둘만 있어도 천하를 통일 하시고 우리는 그와 함께 보좌에 함께 앉는 것이 아닌가? 하며 그들은 오! 오! 이제야 올 것이 오는구나 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불법 자”이기에 족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기록된 예언이 이루어 가는 중에 이제 이루어짐을 족하게 아시고 “족하다”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영의 사람의 생각과 육의 사람의 생각이 판이하게 다름을 보게 됩니다. 오늘도 육의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를 정리해 주실 분은 오직 진리의 영 뿐이십니다.『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아멘.
그러므로『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입니다. 그러므로『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하셨습니다. 주님!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작은 형제 김윤구
나사렛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 중에서, 위에서 나신 그리스도와 아래서 난 제자들의 생각이 다른 데서 온 큰 오해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곧『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증거 된 대로, 하나님께로 난 자의 생각과 사람으로 난 자의 생각은 근본으로 다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자기 혈육을 죽이려 하지만 사람으로 난 자는 자기 혈육을 살리려고 합니다. 이는『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본 질이 다르기에 같을 수 가 없습니다.
또 기록되기를『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아래서 난 사람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성령께서 누구를 통해 성경에 기록 하시기를『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함과 같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지금 낱낱이 살피려면 제게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러면 오늘은 크게 오해된 부분 중에 한곳만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세상에 계실 때에『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하셨던 기록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아들 시몬, 곧 안드레의 형제 시몬에 대하여 가름이 없이 베드로로만 생각하여 혼돈을 가져옵니다. 분명 베드로란 이름은 시몬이 장차 돌이킨 후의 이름을 주님께서 미리 지어 주셨던 것입니다. 기록되기를『....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하심 같이 “지금”의 이름이 아니고 “장차”의 이름 입니다. 사람은 지금과 장차를 혼돈합니다. 그러므로『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해결되는 길은 기록 된 말씀대로『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하심이 이루어 질 때만 빛과 어두움이 나뉘어 지고 “지금”과 “장차”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란 증거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도 지금이 아니고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믿는 자에게는 바라는 구원이 지금 실상의 구원으로 여기게 되는 것뿐입니다. 증거 되기를『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하셨고 또『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 곧 구원의 실상이 있는 자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들의 대화에서 얼마나 생각이 다른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래서 난 나사렛 예수의 제자들은 위에서 나신 생명의 주를 따르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과 하나가 아니기에 자기들의 생명과 나사렛 예수의 목숨을 함께 지키려고 검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를 영의 사람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불법 자”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래전이 예언 되기를『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미리 증거 되었고 이를 생명의 주님께서는 “범죄자 중 하나로”를 “불법자의 동류”로 바꾸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생명의 주께서 왜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라고 그렇게도 검에 대하여 강조 하셨을까요? 여기에서부터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영의 생각은『....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이었으나 육의 생각은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다른 목숨을 죽이는 검(칼)로 생각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라는 증거의 말씀대로 나타나지는 가름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그들에게 미리 “검을 가지지 말라” 하지 않으셨을까요? 진리는 어느 사실에 접 할 때에만 그 효력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또한『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오신 참 빛이셨기에 미리 “검을 가지지 말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그 법과는 상관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 곧 “하지 말라”는 법은 곧 종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법은『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입니다. 이는 예언 된 대로『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함과 같은 것입니다.
종의 법은 죽이는 법이지만 아들의 법은 살리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육신에서의 고백은『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사실이 반드시 필요 했으나 이제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음으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하는 그리스도의 가벼운 멍에를 메고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있었던 제자들은 주님께서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하시니 사람의 생각대로 이제야 자기들이 가지고 다니던 검(칼)을 쓸 때가 된 줄로 알았고 또 이미 두 사람은 벌서부터 검을 가지고 다녔기에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라고 신이 나게 대답하였든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그들이 얼마나 “불법 자”들임을 다시 확인 하시고 “족하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육신에 있었던 제자들은 그 “족하다” 하신 말씀이 검 둘만 있어도 육신의 목숨을 지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많이 흥분 되었을 것이고 또한 앞으로 있어질 일도 상상했었을 것입니다. 풍랑도 잔잔케 하신 예수, 잎이 무성하던 무화과나무도 뿌리까지 마르게 하신 예수, 죽은 자도 살리신 예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인 만은 무리들을 먹이시고도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나 차게 하셨던 예수, 앉은뱅이도 일으키시고 소경도 보게 하시며 문둥이도 깨끗하게 하시고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 까지 만나신 예수, 이제 그가 검 둘만 있어도 천하를 통일 하시고 우리는 그와 함께 보좌에 함께 앉는 것이 아닌가? 하며 그들은 오! 오! 이제야 올 것이 오는구나 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불법 자”이기에 족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기록된 예언이 이루어 가는 중에 이제 이루어짐을 족하게 아시고 “족하다”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영의 사람의 생각과 육의 사람의 생각이 판이하게 다름을 보게 됩니다. 오늘도 육의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를 정리해 주실 분은 오직 진리의 영 뿐이십니다.『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아멘.
그러므로『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입니다. 그러므로『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하셨습니다. 주님!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작은 형제 김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