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작마당

바울의 환상과 계시에 대하여
마당쇠 2005-09-27 오후 8:51






형제님도 항상 평안하시기를 원합니다.
저도 늘 주님주시는 평안 안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형제님의 물음을 통해 다시 말씀을 생각하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1. 환상과 계시는 성경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성경적인 환상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실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만남을 원하실 때 보게 하시는 형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속사람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는 영의 실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과 친히 대할 때에는 환상과 계시가 동시에 있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2. 바울이 세째하늘과 낙원에 이끌려서 본 것은 이서신을 쓰기전 14년 전이라 하는데 이 시점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빛을 보고 난 후 3일동안 눈이 멀었던 그 시기인지 궁금하구요..

바울이 셋째 하늘 곧 낙원에 이끌려갔던 시기는 다메섹에서 빛을 보고난 후 아라비아로 갔었습니다. 거기서 환상과 계시로 힘을 더 얻었습니다. 이에 대하여『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7) 라고 기록되었고 또 다시『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 9:22)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3. 육체의 가시는 바울의 신체적인 질병을 말하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 신체적인 질병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눈 질환?)???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 라고 하신 고백으로 보아 질병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특히 눈 질환이라 볼 수 없는 것은 주께서 아나니아를 보내시어 눈을 났게 하셨습니다. 기록된바『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행 9:17-18) 라고 기록된바와 같이 눈은 “다시 보게 된지라” 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오직 바울 자신과 주님께서만 아실 수 있으나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라고 까지 기록된 것으로 보아, 또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는 기록으로 보아 저는 혹시 자기의 의식 밖에서 있어지는 몽설(夢泄) 같은 괴로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고 소리 지른바와 같이 바울도 성정이 있는 자기 육체와의 선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만일 눈병이라면 "이것이 내게서 났기 위하여"라 기록되었을 것이나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더욱 눈병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4. 천국에 갔다왔다는 등,,많은 환상과 신비적인 체험들을 올리는 글들을 종종 봅니다,,
어떤 부분은 성경내용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어떤 부분은 이상한 신비주의 처럼 빠지거나
너무 소설(?)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 같습니다...바울의 상기 기록을 보건대
여러 환상을 보았지만 상세하게 기록하지 아니하고 자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책들이나 소위 환상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증언들의 진실여부의 판단기준은
무엇이고 그 경계선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 듣고 싶습니다..

성경에 있는 많은 증인들의 환상과 계시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주의 사도께서『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 하심과 같이 경계선은 곧 성경입니다. 우리 모두 오직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하셨고 또다시『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엡 3:5).... 아멘입니다. 고맙습니다.



댓글 4개
다베 2005-09-28 오전 8:0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아름다운 형제 자매님들께 문안 드립니다.

답변하신 내용을 읽고 너무 자세하고 친절 하심에 머리가 수그러집니다. 마치 숟가락으로 자기 자식 먹이를 떠 먹이는 어버이의 모습이며 자신도 완전히 벗고 자식의 몸을 씻겨주는 모습을 연상합니다.
답변 하시는 그 증거의 능력이 목사님 한 분으로 끝나지않고 많은 접붙임이 있어 지기를 원합니다.
내용중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안수받고 병이 나은후 일어나 세례를 받았는데,
바울은 이미 유대인들로 부터 할례까지 받고 세례도 받았을텐데 왜 또 받았을까요?
장성한 바울과 태어나는 바울을 보여주기위한 것인지 아니면 바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와 완전히 구분되는 아나니아의 예법에 따른 것인지 또는 전혀 다른 뜻이 있는지 아직 답변을 얻지 못하여 함께 말씀을 구하고자 합니다.
주 안에서 평안 하시기를 간구드립니다.
김윤구 2005-09-28 오전 9:01


모든 좋은 것은 다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옵니다.
주님께 감사드리며, 형제님의 물음에 제게 알게 하신 한계 안에서 답합니다.

바울이 자신에 대하여『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빌 3:5) 라고 증거하신대로 그는 할례는 받았어도 침례를 받은 일은 없습니다.

기록된바『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침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 7:30) 하심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아나니아에게 침례를 받으신 것은 사울이 바울로 이루어질 구원을 이를 표면적인 표입니다. 기록되기를『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 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물은 아랫물과 윗물이 있습니다. 아랫물은 표면적인 물이요 윗물은 이면적인 물입니다. 이면적인 것이 이루어질 때에는 표면적인 것은 그 효력이 상실됩니다. 이러한 법칙은 곧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위의 물의 침례가 온전한 침례입니다.

이러므로 기록되기를『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엡 4:5) 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침례가 하나가 아니고 “침례들”이라고 아는 믿음은 그리스도도의 초보입니다. 기록되기를『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2) 라고 증거하신대로 입니다. 그러므로 장성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침례들이 아니고 침례입니다. 오직 성령침례 뿐이지요. 고맙습니다.
빛과 소금 2005-09-28 오후 12:04
감사합니다...성경을 부분적으로 알지 아니하고 전체적인 조망을 가지고 균형을 갖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것이라고 여겨 집니다,,,다베님도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윤구목사님의 정성스런 답변에 힘입어
자주 좀 성가시게(^^) 해도 되겠죠 ~~~
김윤구 2005-09-28 오후 1:22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을 통하여 기록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 갈 수 있는 방법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명시한 지도책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대하여『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라고 증거 하십니다.
생명이 있어 자라나는 애기는 배만 곺으면 시도 때도 없이 보챕니다. 성경이 또한 이에 대하여『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아이가 많은 집 곧 하나님의 집은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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