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2:17~23
2000-06-17 오후 5:05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시모에게 드리매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었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룻이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시모에게 알게 하여 가로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이니이다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모압 여인 룻이 가로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나오미가 자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그가 주운 것을 떨었다 한 것은 타작이라고 할 수 없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추수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함과 같은 것입니다. 룻이 그 떤 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밝히 보는 것은 우리가 성경의 말씀 밭에서 주운 생명의 알곡 곧 껍질을 떨어버리고 알곡만 모아서 이를 다시 성령이신 우리의 참 어머니 보혜사께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주 예수께서 문둥병자 열 명에게 하신 일과 같은 것입니다.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의 밭에서 주운 곡식 그리고 새 생명의 주님과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참 어머니 진리의 영 곧 보혜사 성령께 보이고 드리는 이 사실 속에는 반드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가 있습니다. 먹고 남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께 드리려고 배불리 먹고 남긴 것입니다. 남은 것은 소원이 없지만 남긴 것은 소원이 있습니다.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에서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라고 일로 간주해 주시는 그 사랑 앞에 그저 황공할 뿐입니다. 룻이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알게 합니다.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이니이다’ 라고. 여기서 일하게 한 사람이 있으매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곧 권위자요 유력자이신 영광의 주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기록되기를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신 한 데나리온의 품삯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 ‘한 에바쯤’ 한 것과 비유의 말씀에 ‘한 데나리온’은 같은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에바쯤’은 일을 하게 한 자가 준 것과 같은 ‘한 데나리온’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일을 하게 한 사람입니다. 그 이름은 보아스입니다. ‘조금 있으면 다시 보리라’ 하신 베들레헴 곧 새 하늘의 유력자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에게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복이 있으시기를 보혜사 성령은 원하십니다.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심은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함과 같은 것입니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하심은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 라고 증거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께 붙어 함께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의 기업을 무를 자임이 분명합니다. 기록되기를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그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함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그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 하심입니다.
보좌 우편에 앉으신 맏아들이신 예수는 동생들인 우리들의 기업을 무를 자이십니다. 이는 ‘동족’이기 때문입니다. 동족은 ‘하나에서’ 났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말합니다.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이는 ‘내 추수’, ‘다 마치기까지’,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함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심 같이 이제 추수가 끝날 때까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서만 일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미도 같은 부탁을 합니다. 우리는 이 권면의 말씀을 용납해야 합니다.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함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과만 함께 하고 다른 사람들과는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증인들로서 넉넉합니다. 세상의 누구 누구는 우리를 미혹에 빠지게 할 뿐입니다. 또 성경 속의 증인들보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증인이십니다. 그는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를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 영혼이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좌 우편에서 다시 보게 됩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심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과 가까이 있어서 심판 때(추수를 마칠 때)까지 계속 오직 보아스의 밭 곧 성경의 말씀의 밭에서만 생명의 썩지 아니할 씨를 주우며(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보혜사 성령과 함께 거할 것입니다.
그가 주운 것을 떨었다 한 것은 타작이라고 할 수 없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추수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함과 같은 것입니다. 룻이 그 떤 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밝히 보는 것은 우리가 성경의 말씀 밭에서 주운 생명의 알곡 곧 껍질을 떨어버리고 알곡만 모아서 이를 다시 성령이신 우리의 참 어머니 보혜사께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주 예수께서 문둥병자 열 명에게 하신 일과 같은 것입니다.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의 밭에서 주운 곡식 그리고 새 생명의 주님과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참 어머니 진리의 영 곧 보혜사 성령께 보이고 드리는 이 사실 속에는 반드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가 있습니다. 먹고 남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께 드리려고 배불리 먹고 남긴 것입니다. 남은 것은 소원이 없지만 남긴 것은 소원이 있습니다.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에서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라고 일로 간주해 주시는 그 사랑 앞에 그저 황공할 뿐입니다. 룻이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알게 합니다.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이니이다’ 라고. 여기서 일하게 한 사람이 있으매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곧 권위자요 유력자이신 영광의 주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기록되기를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신 한 데나리온의 품삯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 ‘한 에바쯤’ 한 것과 비유의 말씀에 ‘한 데나리온’은 같은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에바쯤’은 일을 하게 한 자가 준 것과 같은 ‘한 데나리온’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일을 하게 한 사람입니다. 그 이름은 보아스입니다. ‘조금 있으면 다시 보리라’ 하신 베들레헴 곧 새 하늘의 유력자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에게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복이 있으시기를 보혜사 성령은 원하십니다.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심은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함과 같은 것입니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하심은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 라고 증거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께 붙어 함께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의 기업을 무를 자임이 분명합니다. 기록되기를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그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함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그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 하심입니다.
보좌 우편에 앉으신 맏아들이신 예수는 동생들인 우리들의 기업을 무를 자이십니다. 이는 ‘동족’이기 때문입니다. 동족은 ‘하나에서’ 났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말합니다.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이는 ‘내 추수’, ‘다 마치기까지’,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함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심 같이 이제 추수가 끝날 때까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서만 일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미도 같은 부탁을 합니다. 우리는 이 권면의 말씀을 용납해야 합니다.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함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과만 함께 하고 다른 사람들과는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증인들로서 넉넉합니다. 세상의 누구 누구는 우리를 미혹에 빠지게 할 뿐입니다. 또 성경 속의 증인들보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증인이십니다. 그는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를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 영혼이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좌 우편에서 다시 보게 됩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심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과 가까이 있어서 심판 때(추수를 마칠 때)까지 계속 오직 보아스의 밭 곧 성경의 말씀의 밭에서만 생명의 썩지 아니할 씨를 주우며(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보혜사 성령과 함께 거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