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주석...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rlemdhs(rlemdhs) 2008-10-24 14:57
-계시와 주석 -
요즘은 많은 교단에서 요한계시록을 알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계시록 세미나 붐이 일고 있으며, 각종 계시록 해설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것은 계시록에 담긴 뜻은 분명 하나일진대 해석은 각각이니 어느 것이 참인가 하는 것이다.
잠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계시록은 계시를 받은 자(“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가 아니고는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계시는 봉해져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봉한 책이니 계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잠겨 진 문을 열 때는 잠글 때 사용했던 그 열쇠로만이 열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달으면 이해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사람의 글이 아닌 하늘의 글 즉, 하나님이라는 신이 주신 신의 글이다. 신서(神書)이기에 아무나 그 뜻을 푸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즉, 봉했던 그 신(神)이 열어주지 않고는 아무나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다는 의미다.
그래서 성경에는 ‘본다고 하니 네 죄가 크다’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실제 오늘날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계시록을 안다고 하니, 성경을 말하면서도 사실은 성경에 반하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다. 이미 교만과 욕심으로 눈이 멀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성경에는 계시란 말이 많이 등장한다. 이 계시는 이사야나 하박국 선지자는 묵시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경 66권 끝에는 사도 요한이 예수의 계시를 받아 기록한 ‘요한계시록’이 있다. 이렇게 계시 또는 계시록이 필요한 이유는 과연 뭘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계시는 먼저 닫혀졌던지 감춰졌던지 아니면 봉해졌다는 전제가 없다면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계시는 열 계(啓), 볼 시(示)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가만히 보니 실제 봉했다, 감추었다, 봉한 책이다, 비밀이다 등의 내용들이 기록된 것을 보아 틀림없이 봉해져 있는 말씀이 있기에 열어 보인다는 계시가 있음이 증명된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보라고 기록되었을 것인데 왜 봉했을까. 그리고 무엇으로 봉했는가. 또 봉하면 어떻게 되고, 열면 어떻게 된단 말인가. 또 열리는 때는 언제이고 어떤 모양과 모습으로 열려지는가. 이와 같은 의문이 풀리지 않고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진정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위의 내용들에 대해 궁금증과 갈급함을 느껴야 마땅하다.
성경은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복이 있다고 산상수훈에서도 교훈하고 있으니 우리는 영적인 가난한 자가 되어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생’ 하나를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그 영생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고 아는 것(요 17:3)이라 증거하고 있으며, 알 수 있는 길은 계시(마 11:27)를 받아야 하고, 아니면 계시 받은 자를 통해 그 계시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만 한다고 분명히 그 길을 제시한다.
이쯤에서 계시 전과 계시 후를 사도 바울을 통해 짚어 보자. 바울은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하시면서 내가 받은 것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들은 것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고백한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지식인 중에 지식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으며 율법으론 흠이 없던 자였으나 계시를 받은 후엔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들은 배설물로 여겨 다 버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배설물이란 옆에 두기조차도 싫은 대상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주신 목자로부터 나오는 계시의 말씀 말고는 절대 옆에 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즉, 계시를 아는 것은 신학(神學)이 되며, 사람이 연구한 온갖 설(設)과 론(論)은 인학(人學)이며, 오늘날 주석 책을 일컫는다. 따라서 계시를 안다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요, 계시가 아닌 온갖 사람이 연구한 말 즉, 주석은 사망의 길잡이임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 온갖 주석이 난무하는 이유는 계시를 받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서를 억지로 풀려는 교만한 마음이 낳은 결과다. 이 사람 저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연구한 것이니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 된다. 에덴동산에 출현했던 뱀의 말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의 열매인 바로 선악과다. “정녕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한 바로 그 열매다.
이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주를 이루고 있는 교단 즉, 장로교의 교리 또한 칼빈 주석이라 하는 사람에 의해 연구된 주석 즉,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섞인 혼돈 그 자체이며 바벨이다. 이것이 장로교의 강령이 되고, 교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칼빈 역시 계시록에 와서는 붓을 꺾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요한계시록 18장에는 상고(商賈)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대로 연구해 장사하는 장사꾼이 등장한다. 그 상고들은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이며, 매매하는 상품은 바로 지금까지 언급한 주석이다. 그러나 그 상품으로 인해 망하는 나라가 있으니 ‘바벨론(계 18:2~3)’이라 표현하고 있다. 육적 바벨론 나라는 벌써 약 이천오백년 전 지구상에서 사라진 나라다. 당시 선민인 육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벨론을 빙자해 오늘날 영적 바벨론 즉,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가 아닌 온갖 사람의 생각이 담긴 주석 책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죽이고 있는 영적 바벨론을 두고 이른 말임을 귀 있는 자는 들어먹어야 한다.
무너지는 영적 바벨론은 ‘보배로운 상품(창세기의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열매)’ 즉, 금잔에 가득 담긴 주석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임을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로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