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여호와에 대하여

화목제물(asd0353) 2005-07-02 14:48

하나님과 여호와에 대하여 (윗 글부터 읽기)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신은 누구인가?
구약의 여호와 와 예수께서 말씀한 아버지 하나님은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과 여호와에 대하여 序 論

神을 문자 속에 담는다는 것이 어리석은 짓인것 같다...
세상에는 수 많은 종족과 민족이 있으며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있고 그 신들의 역할이 있다.

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동물의 의식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신을 만들지 않는다.
인간이 신을 만드는 것은 인간안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의식이 만들어낸다.

자동차를 만든 인간은 나중에 그 자동차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의 두려움의 의식에서 태어난 신은 나중에 그사람과 그 민족의 의식과 정신을 지배한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신이 생겨나고 인간의 역사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그신을 만들어낸 인간의 의식은 여전히 동일하다.

인간의 의식은 의지의 대상을 필요하다.
신의 존재는 인간이 이땅에서 한 생애를 사는 동안에 온갖 재난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 좀더 나은 생활을 위한 祈福과 祈願의 대상으로써의 역할이며 그역할을 다한 신은 인간의 문명의 발전과 함께 사라졌다.(종교는 필요한가 - 버트란 러셀 참고)

신을 필요로하고 신을 만들어낸 인간의 의식은 고대 사회에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변하지않을 것이다.

성경이라는 경전에 기록된 야훼신 역시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가공된 신이다.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신의 형상을 의식속에 이미지화 시키거나 관념화 시켜왔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의 의식으로 부터 인식되어진 신은 참 신이 아니다.
성경 속의 유대인들이 아무리 야훼신의 이름을 부르며 제사하고 섬긴다해도 그신은 자신들의 죽음의 의식이 만들어낸 자기만의 신이다.

신은 신의 의식을 가진자만이 신을 알수있다.
예수는 신이며 그는 아버지 신을 알고 그신을 우리인간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그신의 의식을 인간에게주어 신을 알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였다.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의 영의식,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참 창조주 생명이며, 사랑이며, 빛의 신을 인식할 수 가없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신을 인식하는 인간의 의식은 무엇인가?
구약이 말하는 신은 누구이며 예수께서 아버지라 인식하는 그리스도의 의식과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말하는 신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위 성구를 주목하여 읽어보기 바란다.
사람이 지은 집, 곧 신당이나 신전에 계시지 아니하며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원하지 아니하신다. 예수 이후에 사도들이 인식하는 신이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가? 그대는 이렇게 말하는 신을 인식하는 의식이 존재하는가?

바울이 인식하고 이곳에서 말하려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이시다.(죽은자에 대하여)(산자에 대하여 참조)제목을 누르시면 참조 메뉴가 나옵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와 죄의식이 세상에 들어왔다. 그 죄의식 안에서 모든 사람은 죽은 자가 되었다.
이 죽음의 의식안에 살아가는 인간 앞에 나타난 여호와는누구인가?

예수와 사도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산 자들의 하나님이다.
산자란 영원히 산다는 의식이 있는 자들은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영원히 산다는 의식이 없는 구약의 사람들이 영원히 사는 생명을 만날 수 있는가?

이제부터 예수가 없는 구약에 기록된 신과 신약에 예수께서 말하는 하나님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보자.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는 신에 대해서 교리와 신학은 접어두고 성경 속을 더듬어 살펴볼까 한다.

생령으로서의 아담의 죽음은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이요, 생명의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의 상실이었다.

영생의 생명과를 따먹지 못한 아담은 죽음의 실존으로 전락하여, 참 사람이 아닌 가인(假人)으로써 육체만 움직이는 허깨비가 되었으며 그의 의식은 罪의 노예, 사단마귀의 꼭두각시가 되어 일생을 죽음의 의식 앞에 서서 불안과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힌 존재가 되었다.

아담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생명의 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생명되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인식할 의식을 가진 자가 아무도 없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시대에는 누구도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을 인식하는 의식을 가지지 못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시킬 수 있는 이는 독생자 예수 밖에 없으니, 그가 오시기 전까지 구약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 간접적인 방법은 천사를 仲保로 내세워 섭리한 것이다.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을 알아볼 수 없는 인간의 의식 위에 율법을 가지고 약속하신 아들이 오기까지 하나님을 대신하여 몽학선생으로 군림하였다.
[갈 3:23-26]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우리는 먼저 구약의 여호와 야훼는 누구인지 그 정체에 대하여 사경해보도록 하자.

아담의 후손되는 인류는 누구도 아들이 오기 전까지 생명의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하나님이 인간 앞에 나타나신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하겠으니 좁은 소견을 버리고 고정관념을 깨뜨려 그 진실을 밝혀내보자.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야훼 하나님은 누구인가?
모세가 만난 하나님에 대하여
신약의 사도들은 구약에 율법을 주신 이가 천사라고 말한다.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대하여
신약에 예수와 사도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쓰지않았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야훼 하나님은 누구인가?



지금부터 의식의 눈을 크게 뜨고 성경을 살펴보자.
그대가 영원한 생명을 믿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새로운 의식의 존재라면 이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아담이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상대적 의식이라면 결코 알 수 없으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고, 야곱에게 나타났고, 모세에게 나타났으며, 그밖에 여러 선지자에게 나타났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과연 어떠한 하나님이며 이들은 이 하나님을 어떠한 의식으로 인식을 하였을까?

모세가 만난 하나님에 대하여
모세는 구약 최대의 선지자요, 그리스도의 표상(表象) 인물이다.
성경은 모세의 의식으로 만난 하나님이 천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누가 이사실을 주의깊게 살펴볼까?

오순절 마가의 다각방에서 최초로 성령 받아 생명을 아는 의식을 가진 사도들에 의해서 비로소 이하나님이 누구였는가 밝혀지게 된다.
호렙산 가시떨기 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를 부르신 야훼(여호와)는 천사였다.
[출 3:2-6 ]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행 7: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일어나지 못하니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의 섰는 곳은 거룩한......
[행 7:35]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도 천사였다.
[출 19:3 ]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출 20:1]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행 7:38 ]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가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행 7:53]"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히 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갈 4:8]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신약의 사도들은 밝히 말하고 있다.
구약에 율법을 주신 이가 천사였음을......
구약과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은 동일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중보로 내세워 인간 앞에 하나님처럼 약속하신 아들이 와서 하나님을 알려주기까지 사역하게 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의식은 빛이며 사랑이며 생명인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

신약에는 여호와가 없다.
여호와는 율법을 두려워하는 의식의 존재인 타락한 인간에게 방편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이다.
아들의 영인 성령을 받은 신약의 사람들에게는 생명이며 빛이며 사랑이신 하나님이 영으로 나타나지 천사를 중보로 세운 여호와로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의 부활을 믿고 아들의 영인 성령을 받아 새로운 영 의식의 존재간된 사람은 천사를 중보로 내세워 전해준 율법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아들의 의식을 가진 자라면,그분은 이름이 필요치 않는 그대의 아버지일 뿐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하늘에 계신 분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소개해 주시는 그분의 음성을 인식할 새 의식이 있는 자들이다.

천사가 전해준 율법으로 알아진 하나님 여호와...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믿음을 보여주기까지 모든 사람은 율법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인식되어진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갈 3:23-26]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에대하여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여호와는 사람의 모양이었고 세 천사로 나타난다.
[창 18:1-2]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섰는지라.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여 몸을 땅에 굽혀" .....

[창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창 18:33]"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갔더라."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여호와는 사람모양의 세천사로 나타나는데 이는 참 하나님의 삼위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창 19:1 ]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하나님은 구약에서 천사를 하나님처럼 방편으로 삼아 섭리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마음이 타락한 인간이 생명이며 빛이며 사랑의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던 때에 방편으로 불려진 이름일 뿐이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죄의식 안에 있을때 알아진 하나님 여호와...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인류는 몽학선생(천사)에 의해서 알아진 하나님을 참 하나님인 줄 알수 밖에 없었다.
[갈 3:23-26]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대하여 (천사와 왜 씨름을 하는가?)(야곱이 이스라엘로 改名되다 )
얍복강을 건너기 전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여 이기고 이스라엘이 되는데 그 이름의 뜻은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승리자라는 의미이다.야곱에게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난 그는 누구인가?
[창 32:24-25]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창 32:27-28]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러라."
[호 12:3-4]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그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셨더니"

야곱이 겨루어 이긴 하나님도 천사였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천사가 전해준 율법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인식하는 하나님 여호와...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모든 사람은 율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갈 3:23-26]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야곱이 하나님으로 대면했던 이는 곧 하나님께서 방편으로 인간 앞에 내세운 천사였음을 알아야 하겠다.



모세는 왜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가?
이름이란 사물과 사물을 구분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모세에게 나타난 야훼 하나님은 누구인가.
아브라함이 믿는 전능의 하나님과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차이
원어에 없는 여호와(jehouah)란 호칭은 어디서 왔는가?
모세는 왜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가?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한 계시의 말씀이 없는 침묵의 시대가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이스라엘(야곱)의 자손 70인이 애굽에 이주하여 정착한 다음 모세 때까지 400년간이다.
또 한번은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예수가 오실 때까지 400년간 침묵하신 일이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표상 인물로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킬 해방자로 나오기까지 침묵하신 기간과 신약의 실체 그리스도가 세상 죄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제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기까지 침묵하신 기간, 두 시대의 의미는 같은 맥락이다.

모세와 같은 대선지자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애굽의 유대인들의 마음과 의식은 혼돈과 무질서의 암흑의 시대였다.
새벽이 오기 전의 어두움은 칠흑의 밤이듯 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 소명하실 때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
그 의미는 무엇이며 이름을 묻는 모세의 의식은 어떤 상태일까?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 참조)
[출 3: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모세가 이름을 물을 때에 먼저 모세가 기억하고 있는 조상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 조상이 믿었고 조상과 함께했던 신(神)이라고 자신을 소개해준다.
[출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니"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누구인지 안다. 그리고 조상들에게 역사했던 신에 대한 이미지가 그들 의식속에 존재하고있다.
그러나 긴 세월 애굽에서의 시간은 그들을 애굽의 제신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로 만들었다.
그들이 口傳을 통해 알고있는 조상들에게 역사했던 神은 이미 전설이며 신화가 되어 있었다.

또한 그들은 조상들에게 역사했던 신이 어떻게 불리워지는지 알지못한다.
조상들에게 역사했던 내용은 알지만 그 神을 어떻게 불러야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상들에게 나타난 神은 전능자로 나타났고 죽은 자를 살리는 전능의 신이라고 믿었고 알 뿐 이름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고 약속하신 일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의식속에 남아있는 그들 조상들이 믿었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기억하게 하시는 것이며 그 조상들에게는 전능자 하나님으로 나타났음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전능자 하나님의 神觀.......
[눅 20:37-38]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을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여호와 하나님과 산 자의 하나님!!
이것이 바로 마음이 타락한 인간이 구약의 율법 아래서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과 아들의 영, 성령을 받아 새 의식이된 성도들이 갖는 신관( 神觀 )의 차이이다.

그대는 죄로 생령이 죽은 자였는데 성령을 받고 산 영, 산 의식의 존재가 되어 산 자의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아니면 산 영이 죽은 자로서 육신이 죽으면 영혼이 천국 가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믿는가? 이미 생영이 죽은 자들은 육신이 죽는다고해서 영혼이 천당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담 이래 모든 인간은 영(마음)이 죽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은 의식이 살아야 한다.
영이 살아서 산 자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지 영이 죽었고 육신도 죽어 하늘나라 가고 하나님을 만난다는 구원관은 바른 신앙관이 아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

이름이란 사물과 사물을 구분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각종 제신(諸神)들을 숭배하므로 역할에 따른 각각의 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이란 피조물의 세계에서 사물을 구분하는 방편인데, 그들은 피조물인 애굽의 신들처럼 하나님도 이름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이름을 묻는 의식의 차원의 종교관과 이름 없는 차원은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까닭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출 3: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민족이 숭배하는 신들에 대해서 잘 아는 모세의 이 물음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는 물음인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신다. 이 뜻은 이름이 필요치 않으며, 이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의 뜻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야훼-여호와라는 이름을 가르쳐 주시는데 그 의미를 살펴보자.
[출 3:14-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출 6:2-3 ]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조상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조상들이 인식한 하나님은 "전능자 하나님"이었지 여호와가 아니었다.

"전능하신 하나님(El-shadai-엘솨다이)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여호와 야훼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시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 El-shadai, Yahweh or Jahweh,(엘솨다이, 야훼, 여호와)

여호와(jehouah)란?
본래는 예호와라는 히브리어 자음과 아도니아라는 모음이 결합하여 생겨난 발음으로서 예호와, 야훼라고 발음 된다.
원어에서 여호와라는 발음의 명칭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만 한글 성경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다.

원래 모세에게 가르쳐 준 이름을 그들은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제 3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여 모세에게 가르쳐 줬던 이름을 오랫동안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에 와서는 그 이름을 잊어버리고 '나의 주'라는 의미의 아도나이 야훼라고 불렀고 그것을 우리도 지금까지 쓰고 있다.
여호와는 본래 성경에는 없는 이름이며 원래 모세에게 가르쳐준 이름 또한 알 수가 없다.

왜 여호와는 영원한 이름이 되는가?
이 말은 영원히 산다는 성령의 언약을 받은 언약의 자손에게는 필요치 않은 말이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위해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평화의 왕 멜기세덱을 만나 떡과 포도주를 받으므로 신약의 예수의 진리인 피와 살을 선험적(先驗的)으로 동참한 격이 되어 산 자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삭, 야곱, 요셉 속에 언약의 씨, 약속의 자식에 대한 부활의 비밀을 묻어 두어 그 언약의 씨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이들 조상들에게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으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여호와로 나타나 그들의 영원한 이름과 표호가 되게 하신다. 왜인가?

유다를 장자로 하여 이어지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언약의 자식이 아니라, 육신의 자손이다.
언약의 자식은 요셉을 장자로 하여 오실(역대상 5:1-3) 언약의 씨 예수와 그 후손들이다.(이스라엘의 열두아들 중 누가 장자냐)

"애굽에서 출애굽한 육신의 이스라엘 백성이 불러야하는 이름은 야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신의 종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성령으로 영원히 산다는 언약을 받지못한 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야훼(여호와)라 부른다.종의 멍에를 멘 육신의 자식들이 불러야 할 영원한 이름은 여호와 야훼가되기 때문에 영원한 이름이라 하시는 것이다.

요셉 지파를 따라난 언약의 자식은 이름이 필요치않은 전능자를 아버지라고 부를 것이다.
신약의 예수를 통해 성령의 새영의 의식을 받은 우리 앞에는 죽은 자를 살리는 전능한 생명과 사랑과 빛의 아버지만 계실 뿐이다.

하나님은 천사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모세 앞에 섭리케 했다.
[출 23:20 ]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구약의 하나님은 참 아들들의 신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타락한 세상에 부리는 영인 천사가 맏아들 그리스도께서 오기까지 방편으로 역사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초등 학문인 율법인 수건을 성령으로 벗어 버리고 아들의 의식을 가진 자리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자.
[갈 4:8-9]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예수 믿으면서 그 분이 가르쳐주고 성령이 안에서 그 분이 아버지라고 하거늘 아직도 여호와를 외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아직도 육신의 자식이라.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아직도 종노릇하고 있는 죄와 율법의 노예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호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깨달아 보자.

① 아들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을 수 없다. (예로 육신의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이름이 필요치 않다.)
② 종은 주인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종에게는 주인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
③ 종은 주인의 이름을 직접 부를 수 없다. 여호와, 야훼는 바로 종의 멍에를 쓴 자들이 부르던 하나님의 이름이다.
④ 참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었고, 그 뒤를 따라 부활을 믿는 언약의 자식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다.

그 분의 이름, 아버지 !
약속의 자식들이 그 분 앞에 서는 날 그 분은 우리에게 참 이름을 알려주실 것이다.
[계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낡은 이름. 율법의 종노릇하는 죽음의 의식의 존재들의 입술에서 불려진 낡은 하나님의 이름 야훼, 여호와. 낡은 기독교와 함께 무덤 속에 인봉될 것이다. 이 날까지 어느 교파도 여호와 신관에서 벗어난 교파가 없으며, 어느 신학자도 이 두꺼운 껍질의 신관을 깨뜨린 자가 없다.

참 하나님의 이름을 받을 자가 누구인가?
그대들의 죽은 의식의 가슴을 열어 제치고 자유를 향한 날개짓을 해보자.
여호와와 야훼의 이름의 의미,
여호와라는 이름이 갖는 속성 -질투의 신. 두려움의 신. 복수의 신. 군신
절대자 창조주안에 이러한 속성이 과연있을까?
예수와 사도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사랑이다.
여호와 야훼의 속성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이 죽어버리고 선악으로 상대하고, 비교하며, 차별하는 의식의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에게 그 상대적 의식으로 인식되어진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인가?

질투의 신, 여호와
구약성경의 핵심이되는 모세오경은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에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므로 인하여 그 언약에서 떠난 백성를 벌하고 징치하기 위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이다.(계약을 맺는 이스라엘백성 1-8번 필독)

그 이후에 이들 의식속에는 조상이 믿던 전능의 하나님은 사라지고 두렵고 무서운 이미지와 관념의 야훼신관을 갖게 된다.
이것은 신약의 예수때까지 이어지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그러므로 참 본래의 하나님을 아는자가 없으며 알수도 없다.
그이유는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출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임이니라"
[신 4:24] "네 여호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수 24: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질투의 속성이 있다면 이 얼마나 치졸한 속성인가?
질투는 피조물의 속성이다.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천사에게 방편으로 이름을 주어 인간을 다스리게 했던 이름이요, 그 속성은 질투이다. 타락한 인간 역시 그속성을 가지고 있다.

우상 숭배는 피조물인 천사를 숭배하는 것으로서 진리의 간음이 된다. 천사는 神이 아니다.
다만 신적 존재일 뿐이다. 신적 존재가 되지 못한 인간은 신적 존재인 천사를 神으로 숭배하였다.
신적 존재가 되지 못한 인간은 창조자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그의 아들이 와서 그 길을 알려주기까지 말이다.

에덴동산에는 여러 나무가 있었고, 지혜천사장 루시퍼는 동산 중앙에 위치한 나무로 상징된다.(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의미)
그 지혜천사에게 인간이 하나님에게처럼 경배할때 다른 나무(천사)들이 질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겔 31:7-9]
"그 뿌리가 큰 물가에 있으므로 그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하나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가리우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 동산의 아무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내가 그 가지로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투기하였느니라"

피조물인 천사는 인간에게 경배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타락하지 않은 천사는 인간의 경배를 받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한다.(천사는 神이 아니며.)
[계 19:9-20]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시록 19장 참조)

그런데 에덴 중앙의 아름다운 나무가 인간의 경배를 받으니 각종 나무가 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약에는 천사가 방편으로 하나님처럼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사역했으므로 다른 신을 숭배 할 때에 질투의 속성을 발하는 것이다.
[겔 16:42]
"그러한즉 내가 네게 대한 내 분노가 그치며, 내 투기가 네게서 떠나고 마음이 평안하여 다시는 노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 숭배를 그칠 때 여호와의 질투가 그칠 것을 구약은 약속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의 계약을 어기고 범죄한 백성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경배한다 하면서도 한번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제사드린 일이 없다.
[행 7:42]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는 여호와의 질투를 유발시켜 광야에서 죽어간다.
구약은 장송곡이 울려 퍼지는 거대한 초상집이다. 절대자 하나님에게 어찌 질투라는 속성이 있겠는가?
신약의 아버지 하나님 앞에는 사랑만 있을 뿐이다.

두려운 신, 여호와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의 의식은 여호와를 두렵고 공포스러운 신으로 인식하였다.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서 율법서에 피를 뿌려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을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므로 범죄하여 타락하였다.

범죄한 이들은 죽을까 두려워 한다.
이 두려움의 의식은 결코 진면목의 하나님을 알수 없다.

인간이 죄로 인하여 죽음의 의식에 사로잡힌 존재가되어 버리므로 여호와는 계명과 율법을 채찍삼아 무자비하게 형벌을 가하였다.
이것이 구약이며 예숚게서 오셔서 비로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알려주시며 그증거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신 7:21] "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신 28:58-59 ]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느 1:5 ]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 9:32]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하는 신은 죄로 말미암아 떠는 두려움의 의식의 존재가 섬기는 신이지 아들 예수의 영을 가진자들이 섬기는 신이 아니다.

참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다. 인간에게 공포를 주는 종교는 참이 아니다.
오늘날 두려움에 떠는 저들, 필경은 율법 아래 있는 종이다. 교회 다니는 것은 두려움과 무서움의 마음으로 다니는 것이 아니다.
평안의 성령의 의식과 자유와 기쁨의 의식으로 구원을 찬양하며 구원에 감사하며 가는 것이다.

복수의 신 여호와
여호와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신이었다. 사랑과 용서가 없는 신이다.
[출 21: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
[신 29:20]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불게 하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필경은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 하시되"
[신 7: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어찌 전능자 하나님의 성품속에 복수의 속성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지 복수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이에는 이'라는 복수로써 악을 이기는 상대적 개념이다.

신약에 아들이 가르쳐 준 아버지의 속성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은 구약에서 어찌 조건 없는 사랑을 알겠는가? 복수는 천사들의 성품임을 알아야 한다.

軍神으로서의 여호와
여호와는 전쟁하는 이스라엘의 군신의 이름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평화의 존재이지 전쟁하는 신이 아니다.
[사 13:4]
"산에서 무리의 소리가 남이여, 많은 백성의 소리 같으니, 곧 열국 민족이 함께 모여 떠드는 소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싸움을 위하여 군대를 검열하심이로다"
[사 28:22]
"그러므로 너희는 경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우심할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萬軍)의 주 여호와께로서 들었느니라"
[렘 46:10]
"그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수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가득히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편 유브라데 하숫가에서 희생을 내실 것임이로다"
[암 9:5]
"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무릇 거기 거한 자로 애통하게 하시며, 그 온 땅으로 하수의 넘침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같이 낮아지게 하시는 자요"

사랑을 구호로 삼는 기독교는 어찌된 노릇인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전쟁을 좋아했다.

남의 땅을 빼앗아 식민지화하고 이교도를 학살하면서 그 범죄를 합리화하였는데 이는 사랑의 하나님을 구약적 여호와와 동일하게 잘못 오해된데서 비롯되었으며, 그들이 뿌린 씨앗은 지금도 지구상 도처에서 종교 분쟁을 일으켜 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

여호와는 호전적이고 피 냄새를 풍기는 신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평화를 사랑하신다.(평화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구약의 여호와 신관을 버릴때 새로운 차원의 참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리로 도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