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 무엇인지?
2001-11-16 16:00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딤전 1:9-10) 하심같이 법은 죄인(사람) 에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5) 라 하심이 곧 "영원한 복음" 입니다.
법대로 하면 하나님 앞에서 살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증거의 말씀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왜 주셨을까요? 율법은 유대인에게만 주신 법입니까?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지만 (요 1:17) 유대인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증거를 보십시다.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 외국인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히 할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4:20-22) 라고 기록 된 것 같이 모세로 주신 율법은 외국인에게든지 본토인레게든지 그 법은 동일합니다. 사람에게는 율법 이전에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으로도 죄를 분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계명이 없이는 죄를 정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롬 7:7-9)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에는 "탐심" 이 있습니다. 양심은 이를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율법의 십 계명 중에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탐심"을 "욕구"라고도 합니다. "욕구"가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열 가지 계명 중에 마지막 계명이 바로 사람의 본성을 부정하는 "탐내지 말라" 입니다. 여기에 그 열 번째 계명을 옮겨 봅니다.『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법입니다. 이는 지키라는 법이 아니라 그 앞에서 죽으라는 법입니다. 옳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죽이려고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끌고 가는) 청지기(사환)입니다.
탐심 곧 욕심은 죄를 이루는 본질입니다. 기록되기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함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탐심은 곧 우상을 숭배하는 죄와 같은 것입니다. (골 3:5)『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기록 된 것 같이 탐심의 대상은 곧 섬김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키면 그로 인하여 사는 것으로 알아 왔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을 살게 하는 법이 아니고 죽이는 법입니다. 기록되기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 3:21) 하셨고 또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고 증거 하셨습니다.
또 증거하기를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롬 7:10-13) 그러므로 율법은 죄로 심히 죄 되게 하기 위하여 세우신 언약이며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몽학(청지기, 사환) 선생입니다.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기에 모세의 직분은 곧 정죄의 직분입니다. 기록되기를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 3:9) 함과 같은 것입니다.
모세는 정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의를 이르기 위하여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 하셨습니다. 기록되기를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 3:5-6) 함과 같은 것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하였고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증거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무는 곧 십자가입니다.
이로서 진리의 영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은 율법이 문제가 아니고 사람이 문제입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율법도 함께 마칩니다. 율법에 대하여 사도 바울께서 단호하게 증거 한 기록을 보십시다.『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 4:15) 하였고 심지어는 율법은 사람의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을 살게 하는 법이 아니고 사람을 심히(완전히) 정죄하여 꼼짝없이 죽이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하셨습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5-16) 라고 말입니다.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원수 된 것" 이라고 증거 하십니다.
의문(율법)이 왜 사람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이는 법을 범하는 사람을 확실하게 정죄하여 나무(십자가)에 달아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의문(율법)은 죄인(사람)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또 율법이 사람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0-20) 하신 대로 죄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저주! 곧 나무(십자가)에 달린 자 마다 저주를 받은 자! 이것이 율법의 마침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원수 갚는 것은 원수 된 것을 죽이는 것이지만 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원수 갚는 것은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를 앞서 가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밝히 증거 하시고 이를 이루셨습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이르신 이 길이 율법에서 벗어나 새롭고 산길을 가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 동안 만 주장합니다. 이는 죄인을 다스리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법은 죄인이 죽으면 끝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를 끝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 2:19) 이제 이 죽게 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 되고 바울같이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옛 사람을 벗어버린 믿음의 법 아래서 다시난 참 하나님의 자녀들이 과연 이 땅 얼마나 있습니까? 증거의 말씀대로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하심 같이 지금은 엘리야의 때와 같습니다. 기록된바『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2-6) 아멘.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는 그 말씀에 소망을 품고 갇혔던 사망의 몸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기록된 말씀같이『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슥 9:12) 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은 이제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새 사람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사도 바울과 함께 간증하는 참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심이 이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증거 된 것 같이 율법은 우리 옛 사람이 약속하신 자손(예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만 있을 뿐입니다. 죄의 법으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의 법으로입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증거 하셨고 또한 주님이 친히『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8-9)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 7:19)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 7:28)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 7:16-19)
율법이 무엇인지 보내주신 진리의 성령으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아멘.
작은 형제 김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