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
2001-02-03 15:52
1. 이삭 속의 충실한 곡식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충실한 곡식이라(막4;28)>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 하시고 열매가 익으면 낫을 대나니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고 비유로 설명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처럼 씨뿌림을 받고서도 싹으로 멈추거나 이삭으로 끝나게 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게됩니다. 하나님나라는 싹도 이삭도 아닌 충실한 곡식만이 곡간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삭 속의 충실한 곡식인 열매의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또한 열매의 주인은 농부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농부는 품삯만 받는 것이고 타작마당에서 수확된 모든 곡식은 주인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4;6)> 하는 바울 사도의 충성된 농부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의 농부로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라나게 하는 믿음의 단계에서 바른 복음을 전하려는 말씀들을 살펴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갈4;19-20)>
바울 사도 역시 농부로서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의 시초에는 자신도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고 생각하는 것도 하는 일도 어린아이와 같았는데 장성한 자가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복음의 시초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복음을 전할 때에는 교인들이 그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고 원하면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정도였는데 이제 알곡이 된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싹이나 이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연약함에 머물러있어 열매의 단계를 전하니 오히려 받아드리지 않고 자신을 멀리하므로 이제는 너희가 육체의 약함에서 벗어나서 이삭 속의 충실한 알곡인 그리스도의 영으로 자라나는 수고를 계속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싹이나 이삭의 단계에 있었을 때에는 육체의 생각으로 사람을 알았고 그리스도도 육체의 생각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이삭에서 알곡이 채워진 열매가 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의 음성까지 변하려 하는 달라진 모습을 그들에게 증거 하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아무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우리의 믿음은 앉아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어제와 오늘이 달라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범사에 그에게까지 쉬지 않고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계속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라 그에게까지 자라면 그는 머리이시니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몸은 성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서 도달하여 하나님의 몸에 들어가면 성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으면 그는 싹이요 이삭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밭에 속하는 자 곧 땅에 속한 자 입니다. 기껏 해야 아직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초보입니다, 그래서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5;12-13)> 하였습니다.
의의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그 말씀인데 그에게까지 자라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그때까지는 우리의 중보 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목자의 음성을 통하여 복음을 전해주시고 있지만 젖을 떼고 단단한 식물을 먹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기까지는 범사에 쉬지 않고 그에게까지 자라나야 아버지의 몸 안에 거하게 되어서 성전의 말씀을 듣고 서로 마음을 나누는 역사를 이루게됩니다. 이때 그의 마음은 곧 아버지의 마음이니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려함이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2. 아담 안의 진리
이삭 속의 충실한 곡식이 되려 거나 젖을 떼고 단단한 식물을 먹는 열매의 단계에 들어가려면 성경 속에 감 추인 아담에 대한 깊은 비밀을 깨달아야합니다,
옛사람으로서는 부끄럽지만 주안에서는 자랑합니다. 저는 태 중에서부터 목사의 아들로 성장했고 서투른 말을 기도로 배운 모태신앙인 이었지만 사실적인 복음을 깨달은 것은 18세부터 였으니 지금까지 47년 동안 진리를 알았다고 돌아다니며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였고 실은 내 속의 나를 주장하면서 아니라며 주의 종을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진리가 뭔가 될듯 말듯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아 때로는 고뇌 속에서 방황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하는 사망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것처럼 뒤늦게 주의 지극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불순종의 생명 안에서 죽음을 처리해보려는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타난 순종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정말 한없는 눈물로 계속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그것은 이전의 불순종가운데에서 행하려 했던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내 안에 계신 순종의 생명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심정은 무언가 그립기도 하고 서운한 것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듯도 합니다. 마치 젖뗀 아이가 어미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전의 일들은 숨은 부끄러움입니다. 숨은 부끄러움의 일은 어두움의 짓이며 그 마지막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벗어버리고 순종의 사람으로 죄에서 해방되고 의의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생명의 열매를 얻어야합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성령의 선물을 주시고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의에 이르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이스라엘민족은 40년간을 광야에서 방황했는데 저는 이보다 더 많은 47년간을 방황하다가 아담에 관한 깊은 진리를 깨닫고 불순종에서 순종의 생명으로 다시 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은 더 이상 방황하지 마시고 이 진리에 거하시기를 원합니다.
지금부터 드리는 자세한 말씀을 깊이 새기셔서 여러분의 마음이 순종의 길로 선택되어 아버지의 은혜의 선물로 거듭나는 아름다운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길 소원합니다.
1)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5;19)
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22)
3)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5)
4)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15;47)
위의 네 구절 말씀을 비교 해보면, 불순종의 사람과 순종의 사람, 아담과 그리스도,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 첫 사람과 둘째 사람으로 나뉘어 구분됩니다.
사실 지금까지 아담하면 우리머리에는 에덴 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첫 사람 아담만 생각났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첫 아담에게만 생각의 비중을 많이 둔 것입니다. 아니 이제 보면 더 이상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죽음을 첫 사람 아담 안에서 죽은 것으로만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밝혀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건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14)>
물론 그가 죽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고 순종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순종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던 하와에게 잘못을 전가 시켰던 첫 사람 아담은 끝내 불순종으로 죽음을 받아 드리지 않고 죄인으로 육신의 수명만큼 살다가 영원히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인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록 죄는 없으셨지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첫 사람 아담에게 정녕 죽으리라 했던 그 죽음을 단번에 드려서 십자가에 처리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귀하고 귀한 순종의 사람입니다.
이일을 주님께서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마21;28-31)>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의 형상을 입고 나왔기 때문에 예 하고 대답은 하지만 가지 않으려는 불순종의 의식과 습성이 육신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하는 첫 사람 아담의 혈육을 받은 우리의 습성을 잘 표현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듣고 기가 막히는 진리를 알았다 한들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비가 자식에게 일을 시키고 돌아와 보니 첫 아들처럼 행함이 없으면 너 왜 내 말을 안 들었어 하는 것처럼 분명히 좋은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고 하지만 행함이 없으면 말씀을 전혀 안들은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 사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의 사람이어서 기분 좋게 예하고 혼 쾌히 십자가에 매달렸습니까 아닙니다. 주님도 불순종의 요소를 지닌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심히 고민하여 죽게되었다 하셨습니다. 또 거역하고 싶은 육신의 습성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하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고싶은 기도를 하시고 땀이 피방울 같이 되더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주님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순종의 길을 곧 십자가의 도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거역하고 싶지만 주님처럼 말씀대로 순종하여 아버지의 원대로 따르는 길을 택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하였습니까
< 예수께서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셔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땀이 피방울같이 되는 기도를 드리고 오시니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미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26;41)>
이렇게 제자들처럼 예 하고 대답은 했지만 세상에서 할 일이 많아 바쁘고 몸도 피곤하고 아프기도 하고 사람들과의 약속도 생겨서 마음은 원하나 못하고 마는 것이 우리인간이 지닌 육체의 습성입니다,
때로는 좋은 말씀을 듣거나 성경을 읽는 동안 무언가 내 마음에 와 닿아서 아 내가 주와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되겠다 예수와 함께 연합하여 죽고 살아야지 하고 결심을 해보지만 작심삼일로 끝나고 맙니다. 오랜 세월을 이러한 반복으로 그치게되는 행위에 대한 권고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 지니라(히6;1-2) >
그리스도의 초보, 기독교의 교훈, 또는 교리의 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치 싹과 이삭의 모양은 있으나 이삭 속에 충실한 알곡이 없는 것과 같아 하나님나라의 곡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충실한 알곡외에는 모두 혈과 육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이 있는 자는 하나님나라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영생이 없습니다. 육이 있는 자는 겉으로는 예하고 대답은 잘하지만 행함이 없기 때문에 머리 속의 생각과 입으로는 나는 회개했다. 나는 예수 믿는다. 나는 안수 받았다. 나는 소망이 있고 나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 하면서 “나”라는 옛 사람의 잔재가 남아 그리스도의 초보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교훈의 터만 다시 닦는 것입니다. 이러한 옛 사람의 구습을 과감히 벗어 던져버리고 하기 싫은 거역의 마음이 생겨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순종의 길로 나아 갈 때 다시 거듭나는 역사로 우리 앞에 영원한 하나님의 참 세계가 주님의 약속대로 이루어 질줄 압니다.
3. 아담의 선택
첫 사람 아담은 생명의 산영이 되었는데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순종하심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런고로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첫 사람 아담 안에 있는 우리는 마지막 아담으로, 불순종의 아들에서 순종의 아들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씀을 여러분은 기이히 여기지 않고 이제는 확실한 말씀으로 받아 드릴 줄 믿습니다. 악과 선, 불순종과 순종, 어둠과 빛,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 이 모두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아담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아담입니다. 땅에서 난 첫 사람 아담이 있고 하늘에서 난 마지막 아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아담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대로 첫 사람으로 난 육의 몸으로 그럭저럭 살다가 죽을 것인가. 그런데 이 죽음은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는 마지막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육이 끝나니 무언가 서운하지만 첫 사람 아담을 버리고 순종의 둘째 사람 마지막 아담을 선택하여 거듭나는 새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첫 사람 아담 안에 있던 우리가 마지막 아담으로 거듭난다고 코나 눈썹이 달라지는 것같은 외형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습 이대로 있지만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사람에서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의롭다함을 얻어 의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리라는 그대로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와 함께 영광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죽음이지만 죽음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그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하셨고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기셨으면 주안에 있는 우리도 이긴 것입니다. 이긴다는 것은 불순종을 버리고 순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선택
밀밭에서 자란 밀을 밀싹, 밀이삭, 밀알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이중 밀 알을 제외한 나머지는 베임을 받고 불살라집니다. 밀자가 붙었다고 다같이 곡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밀 알만 선택되는 것입니다, 표상은 장차 올 것에 대한 그림자 같은 모형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장차 오실 자의 표상이었습니다, 표상은 견본이나 모델같은 것인데 정품을 팔기 위한 보조수단에 불과 합니다. 진짜로 파는 것은 정품뿐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육의 몸, 곧 어둡고 더럽고 약하고 욕된 몸이나 마지막 아담은 깨끗하고 정결하고 신령한 몸입니다. 육의 몸이 있은 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는 말씀대로 우리도 육에 있었던 세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듭난 신령한 몸으로 새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줄 압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세 아들이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얻은 아들 이삭만이 유업을 받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늙도록 자식이 없어 처음에 양자로 삼은 엘리에셀이 있는데 그는 아브라함의 혈육과 상관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세상사람 곧 성전 밖 마당에 있는 사람으로 전혀 구원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뒤늦게 자기의 혈육으로 난 이스마엘은 계집종 하갈에게서 났기 때문에 그의 후사가 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오직 그의 처 사라에게서 난 이삭만이 기업을 이어 받았습니다. 이삭이 어려서는 이스마엘에게 핍박받고 놀림을 받았지만 그가 젖을 떼는 날 즉 단단한 식물을 먹는 날 이스마엘은 쫒겨 나가고 그는 후사가 되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이지만 그들이 도저히 낳을 수 없는 조건에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자녀라야 유업을 받습니다. 세상에서 인간적으로 도덕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엘리에셀과 같은 세상사람이나 계집종 하갈에게 난 이스마엘같은 육체와 상관되는 계명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사람이 아닙니다.
5. 나의 의와 정죄
세상에서 자기는 별로 잘못 한 것도 없고 악도 없어서 사는 동안 죄만 안 짓고 양심적으로 착하게 살면 천당 가겠지 하고 인성으로 사람의 의를 주장하며 사는 사람들은 율법을 통과 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반드시 율법을 통과하여야만 죄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또 죄를 깨달아야 정 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아서 정죄의 직분을 수행 한 것입니다.
<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우리가 육신으로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의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여 나는 십자가에서 처리해야 되겠구나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하는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있어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새 생명의 주인을 영접 할 수 있게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율법으로 그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절기와 규례에 따라 음식을 가리고 주야로 기도하며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처하는 바리세인과 같은 사람과 예수는 몰라도 법 없이도 살수 있다는 세상 사람들 이 두 부류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가 없고 멸절 될 수밖에 없는 삼분지 이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나라의 곡간에 들어가는 충실한 알곡은 약속으로 낳아주신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 뿐 입니다, 그 생명은 나의 혈과 육을 주장하지 않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충만하여 영광의 광채가 환히 비쳐 질줄 압니다. 양심적인 자기 또는 율법의 행위로 내가 구원을 얻으려고 내가 천국을 이루어보려는 나를 기초로 하고 있을 때 나와 하나님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6. 순종의 자녀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 >
이러한 믿음이 실체화되어야 하나님나라의 영광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은 내 영광이 아니고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천국의 기쁨도 즐거움도 아버지의 것이고 오로지 찬송 받으실 내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하여주신 그 은혜만을 감사하여 한없는 눈물을 흘리는 순종의 자녀로 나타나지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기 몫을 챙기고 먼 타국으로 아버지를 떠났던 불순종의 자식이었습니다,
내 믿음으로 내 영광 내 구원을 구하고 나의 유익에 갖다 부치는 첫 사람 아담 안에 있던 불순종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순종으로 떠났던 아들이 뉘우치고 순종의 아들로 변화되어 “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 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 하였습니다. 이전에 내 것을 주장하였던 옛 사람을 완전히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맡기는 순종의 아들로 거듭 난 것입니다, 이같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을 지라도 그가 회개하고 순종의 아들로 다시 나서 아버지 앞에 나서면 다 용서 해주시고 기뻐하시며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시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두 제자 베드로와 가롯 유다를 비교 해봅니다. 둘 다 죄를 지었지만 베드로는 뉘우치고 주님 앞에 나아갔지만 가롯 유다는 자기 스스로 자신을 해결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엄청나게 다른 것이었습니다. 긍휼을 얻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는 우리 죄인들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앞에 그의 의를 힘입고 그의 약속을 믿고 그의 맹세를 의지하고 담대히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만물의 찌꺼기 같은 저에게 죄인 중의 괴수인 저에게 어찌 귀한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주시나이까 저는 감당치 못 하겠나이다 할 때 그 속에서 감당 할 수 있는 순종의 생명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만한자 물리치시고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그을린 나무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 갈 때 하나님께서는 정한 옷을 입혀라 하셨고 스가랴가 정한 관을 씌우소서 하매 정한 관을 씌우고 정한 옷을 입힌 것처럼 우리가 순종의 길로 담대히 나아가기만 하면 아버지께서는 다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결코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7. 결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입니다. 그 죽음은 우리에게 죄 값으로 정녕 죽으리라 하셨던 하나님의 불변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이 죽음을 첫 사람 아담처럼 적당히 피하려는 불순종을 벗어 버리고 우리는 순종으로 영접해서 나 같은 죄인은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하는 행함이 이루어져서 정과 욕심을 온전히 벗어버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들에게 역사 되어 이 땅에 풍성한 열매들이 맺어져서 알곡이 익는 와삭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들려져서 <추수 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 하신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기도로 나타나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한번 더 아담을 정리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죽음은 첫 사람 아담 안에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대답은 예 하지만 육신의 고난이 두려워 행하지 않고 어두움에 숨어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예수 님은 우리와 같은 불순종의 습성을 가진 육체를 가졌으나 위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의 원대로 하지않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는 행함이 있는 순종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몸을 드려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 죽음으로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의의 몸으로 거듭 난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 안이라야 죽음도 새 생명도 이루어집니다. 불순종의 첫 아담은 두려워서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님을 그저 바라만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면서 자기 감정으로 울기도 하며 내 죄를 대속 하셨네 하면서도 자신은 결코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첫 아담 안에서 죽음을 해결하고 마지막 아담 안에서 산것만을 이루려는 잘못을 범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모든 것은 마지막 아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분이 바로 진리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마지막 아담 안에서 우리들의 구원이 이루어져서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 하는 외침이 여기 저기 함성으로 울려서 이 소리로 아버지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순종의 자녀로 되어서 나타나지게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아멘